오늘 비가 억수로 쏟아질 거라던 일기예보가 웬일로 들어맞아, 4교시가 될 즈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5교시 체육인데 계속 내리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는 짝꿍에게 이렇게 쏟아지는데 당연히 소나기일 거라고 대충 대답했으나, 안타깝게도 구름은 내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 더 거세게 비를 내리기만 했다. 원래 이 시간쯤이면 매미가 전생에 잃은 짝지라도 찾겠다는 듯이 맴맴 울어대야 정상인데, 매미도 빗속에서 구애해 봤자 대답하는 멍청이는 없단 걸 알기라도 하는 건지 맴맴 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커튼으로 가린 창문 밖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만 혼자 시끄러웠다. 비까지 맞으면서 먹기는 귀찮아서 점심밥을 굶었더니 또 금세 배가 꼬르륵거렸다. 아, 배고파. 없는 사정도 아닌데 굶어야 하는 처지가, 내 처지도 모르고 내리는 비가 너무 미웠다. 역시 비 내리는 날에는 좋은 게 하나도 없다.

 

나와 비의 악연은 꽤 유서 깊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난 안 좋은 일의 구 할 정도는 비가 내리는 날에 일어났고, 비가 내리는 날의 구 할 하고도 구 푼 정도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 어릴 때는 나도 내 나름대로 로망이 있었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냥 한 번쯤 그래 보고 싶다는 마음에 우비 하나 달랑 쓰고 비를 맞으며 좋다고 헤실댄 적이 있었는데, 그다음 날 독감에 걸려서 죽는 줄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비와 나의 악연은.

 

내 나이가 한 자릿수일 때 일어난 최악의 사건은 전술한 독감(심지어 나는 독감이 유행하기도 전에 예방주사를 미리 맞은 상태였다)에 걸린 일이었고, 초등학교 때 일어난 최악의 사건은 엄마가 집을 나간 거였다. 그날도 비가 억수로 내렸는데, 그다음으로 비가 내린 날도, 그다음의 다음으로 비가 내린 날도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커서야 깨달았지만 그건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 정말 집을 나간, 이혼이었으니 그게 되레 더 당연지사였다. 중학교 1학년 첫 등교 날에는 비가 오는 바람에 차에 살짝 치여서 1주간 입원하다가 퇴원한 후 등교한 뒤 분위기에 못 섞여서 1년 내내 반에서 없는 사람으로 지냈고, 중학교 3학년 2학기 기말고사 마지막 날에는 그 전날까지 다 올백이었는데 갑자기 3교시(심지어 시험 마지막 날이라서 3교시가 마지막 교시였다)부터 비가 쏟아지더니 결국 3교시 과목이었던 수학에서 마킹 실수 하나를 저지르는 바람에 5점(심지어 수학 문제 배점은 3점부터 5점까지였으므로 5점이면 객관식 최고 배점이 걸린 문제였다)을 깎인 95점을 받아서 3학년 내내 유지했던 시험 성적 전교 1등을 놓쳤다.

 

나를 진심으로 보호해 주는 사람이라는 뜻의 보호자가 있었더라면 이런 징크스라기에도 뭐한 상황을 어느 정도는 심각하게 여기고 미신적인 방법으로든 현실적인 방법으로든 도와주려고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그런 사람은 없었다. 법적으로는 보호자가 한 명 있었지만, 그 사람은 내 보호자는 아니었다. 어폐가 있기는 해도 여하튼 그랬다. 그런 삶을 한 18년째 살다 보니, 이제는 비가 오면 진저리가 다 났다. 애도 아니고 비 내린다고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오는 애들만큼 한심한 게 없었다. 비가 오는 게 뭐가 좋냔 말이다. 이렇게나 거지 같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오늘은 아직은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물함을 열다가 갑자기 이마를 찧어서 이마가 살짝 찢어지는 일도 없었고, 계단을 청소하다가 살짝 굴러서 쪽팔리는 일도 없었으며, 점심을 왜 안 먹었냐며 선생님께 혼나는 일도 없었다. 물론, 내 인생에서 비 내리는 날도 많았고 그중 불행한 일이 일어난 날이 많았긴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날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 평범조차 흔치 않은 나에게는 평범 정도면 기적이었다. 한마디로, 오늘 정도면 거의 기적이었다. 애초에 1리(천 분의 일) 정도면 거의 기적이 맞지 않는가.

 

할 말이 많기로 유명한 우리 선생님은 오늘도 말을 길게 하셨다. 다른 반 애들이 먼저 집으로 가는 게 복도로 보였으나, 뭐 이 정도는 괜찮았다. 불행이라기보단 일상이니까. 나는 계단 청소를 매일 하는 담당이기 때문에 비가 내린 오늘은 마포 질이 살짝 힘들 것 같긴 했는데, 뭐 이것도 괜찮았다. 학원도 없는데 조금 정성 들여 청소하면 될 일이니까.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큼지막한 쓰레기를 줍고 마포로 열심히 닦으니 계단은 생각보다 금세 깨끗해졌다. 특별 청소 구역이다 보니 선생님께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검사해 주셨고, 검사를 통과한 다음 반에 갔을 때는 남은 가방이 하나도 없었다. 하긴, 나에게 문을 잠가 달라고 하신 걸 보면 내가 마지막인가 보다 싶기는 했다.

 

가방을 챙기곤 문을 잠근 후 1층 정문 쪽으로 향했다. 오늘은 조금 늦장 부리고 싶은 기분이니 일부러 정문으로 빙 돌아서 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봐도 운이 조금 좋은 날인 것 같아서 운동화를 신을까 고민까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데 분명 흙탕물을 밟을 게 분명했기에 결국은 신발을 갈아신지 않기로 했다. 슬리퍼는 좀 더러워져도 씻기가 편해서 괜찮지만, 운동화는 빨면 며칠은 못 신으니 함부로 신어선 안 됐다. 가벼운 몸을 안고 가방 옆구리에서 접이식 우산 하나를 펴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펴는데, 갑자기 누군가 내 어깨를 치는 것이 느껴졌다.

 

“저, 저기!”

 

아, 그 아이는 숨을 조금 몰아쉬며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인가, 하고 고민하느라 가만히 있었더니 그 애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혹시, 우산 있어……?”

 

하고 물어 왔다. 우산을 뜯어가기라도 할 생각인가 하는 비뚤어진 마음을 갖고 그 애를 뻔히 쳐다보는데, 순간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이건, 내 18년 인생 속 있었던 수많은 비 내리는 날 중 처음으로 찾아온 기적이 분명했다. 그냥 운명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런 걸 뭐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혹시, 나랑 같이 써 줄 수 있을까……?”

 

아, 맞다. 그래, 사람들은 이런 기적을 두고서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

 

 

 

 

 

 

 

 

 

 

그 애는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쭉 가면 있는 교회 주변에 산댔다. 우리 집과는 단어 그대로 정반대의 방향이었는데, 차마 첫눈에 반한 상대를 두고 그렇게 깡 있는 거절을 할 위인은 못 되는 터라 결국 그 애의 집 앞까지 데려다주기로 하고 말았다. 여태까지 대화 딱 한 번 해 본 적 없던 사이에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그 애는 그냥 가는 길에 있는 예스 마트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런데 그냥, 조금 더 걷는 것도 딱히 귀찮지는 않아서, 집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끝나고 학원도 없으니 딱히 상관도 없었다.

 

“정확히 어디 쪽이야? 내가 거기 살지는 않아서, 잘은 모르거든.”

“앞으로 쭉 가면 돼! 아파트 들어가서는 내가 알려 줄게. 내가 사는 데인데도 이상하게 말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기억이 안 나네.”

“원래 그렇지, 뭐. 알겠어. 그럼 그냥 쭉 가자.”

“고마워, 민석아.”

 

마치 원래 아는 사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레 불린 이름에, 문득 신기해 내 이름 아는구나, 하고 내뱉었다.

 

“그럼! 반장인데 이름도 모르면 안 되지 않겠어?”

“그건 그러네. 그래도 대화해 본 적은 없잖아. 그래서 모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아, 그 애의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고 그대로 미끄러졌다.

 

“되게 할 말이 없네……. 어, 음, 고마워, 백현아.”

“이거 가지고 뭘! 나, 나도 고마워, 민석아.”

 

짧은 대화가 끝나고 다시 정적만이 찾아왔다. 비가 내리는 게 싫지 않기는 또 처음이었다. 조용한 사이에 비 내리는 소리가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말 어색하게 내내 걸었다. 그렇게 10분인가를 걷다 보니, 어느새 그 애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단지에 들어가고 나서는 길을 몰라 그냥 걔가 “왼쪽이야.” 하고 말하면 왼쪽으로 꺾고, 오른쪽이라고 살짝 걸음을 틀면 오른쪽으로 꺾으며 또 조용히 걸었다. 아무리 내가 붙임성이 없대도 이렇게 어색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새 그 애의 걸음이 멈추었다. 아마도 이 바로 앞의 203동이 자기 집인 듯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사실, 이렇게까지는 안 해 줘도 되는데.”

“우산 있냐며. 한 개밖에 없는데, 이걸 줄 순 없잖아.”

“응. 그건 그런, 어…… 그러니까, 그건 그런데, 그래도…….”

“괜찮아. 음…… 사실 우리 집도 이쪽이야.”

“거짓말. 너희 집은 후문으로 나가서, 헉…….”

 

그 애 말을 듣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우리 반 반장이라고는 해도, 나랑 제대로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저 애가 우리 집이 어느 방향인지는 어떻게 알지? 서로 스토킹할 사이도 못 됐기 때문에 되레 의문이 더 들었다. 도대체 우리 집이 그쪽인 건 어떻게 안 걸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으나, 그냥 떠오르는 해답이 없었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열지도 못하는 채 멍청한 소리만 연신 내뱉고 있는데, 그 애가 갑자기 말을 이었다.

 

“내가 막 쫓아간 건 아니고, 나도 옛날엔 그쪽 살았거든! 사실, 너랑 같은 아파트 라인이었어. 그래서 1학년 때 계속 봤는데, 아 물론 너는 못 봤겠지만, 여하튼 친해지고 싶었거든……. 근데 네가 몇 학년인지도 몰랐고, 몇 반인지도 몰랐어. 네 명찰을 보면 알았겠지만, 명찰 보느라고 뻔히 쳐다보면 네가 뭐라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그냥 가끔 집 갈 때 너를 봤는데, 어, 응. 그냥, 그랬다고. 그, 오해는 하지 말아 줘.”

“나 1학년 3반이었어.”

“아…… 난 10반이었는데. 너무 멀어서 한 번도 못 본 거였구나! 아, 맞다. 1학년 3반 쌤이랑 10반 쌤이랑 사귀셨지? 맞아. 그래서 종례가 비슷하게 끝났는데……. 그래서 우리가 자주 만났던 건가 봐.”

“응, 그러게.”

“응, 어, 응. 그…… 그래! 여하튼 오늘은 진짜 고마워. 어어, 음, 내가 다음에 떡볶이 사 줄게! 좋지? 다른 거도 괜찮아. 뭐, 어묵이라든가, 순대라든가, 튀김이라든가, 아니면 뭐 다른 거라든가! 진짜 다 사 줄게.”

 

분식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아무거나 사 주겠다는 그 애를 보며 대충 떡볶이나 사 달라 했다.

 

“그럼 약속 잡아야 하니까, 번호 찍어 주라. 수작 부리는 거 아니다? 그, 그냥 나중에 약속 잡아야 하니까 그런 거다?”

“알겠어. 얼른 들어가, 나도 집 가야 해.”

“헉, 미안.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구나……. 잘 가! 진짜 고마워! 내가 문자 보내 둘게!”

 

나와는 다르게 한마디 한마디가 활기차고 (왜인진 모르겠으나) 연신 횡설수설하는 그 애를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애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가만히 손을 흔드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는 것 치고는 별로 습하지 않은데도 그 애의 귀가 시뻘겠다. 그 이유를 찾지 못해 괜히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 집으로 걸음을 향했다.

 

집에 가는 내내 그 애가 한 말을 곱씹었다. 유난히 늦게 끝나는 종례와 더불어 내가 살던 아파트에는 아이들이 별로 살지 않았던 탓에, 나는 사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애가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공원을 지나 단독 주택 사이의 쓸쓸한 길을 걸으며 가끔은 울었고, 또 가끔은 펑펑 울었다. 그 애는 그런 나도 알고 있는 거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서, 알면서도, 나에게 말을 걸었구나.

 

여태까지 나를 찾아온 적도 없고 내가 찾은 적도 없으나 내가 만났던 수많은 불행을 떠올렸다. 지독하기 그지없었던 그 수많은 불행은 사실 그 누구도 의도한 적 없기에 더욱이나 불행했다. 그러나, 그 애는 무언가 다른 듯싶었다. 그냥,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우중충한 하늘과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비, 우리 눈치를 살피느라 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길고양이―그 모든 게 딱히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하게 느꼈다. 나는 어쩌면, 이 짙은 먹구름 속에서 저 햇빛 한 줄기를 만난 걸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조금 절망스럽게도, 나는 저 아이를 좋아할 거라고. 어쩌면 좀 많이,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그 사건’은 다행히도 금요일이었다. 그렇기에 약 2일 동안은 그 애매한 어색함을 피할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금요일로부터 겨우 2일 후는 학교에 가야 하는 월요일이었다. 오늘은 바로 그 월요일이었고. 아주 잠깐 그 애가 학교에 오지 않는 것도 바랐으나, 그 애가 아프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겹쳐 결국 한낱 바람조차도 없는 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살짝 늦장을 부려 학교에 가니 그 애는 벌써 반에 와 있었다. 역시 나와의 일 같은 건 별거 아니었던 건지, 친구들과 그저 평소처럼 장난치고 있을 뿐이었다. 혼자 신경 쓴 게 피부에 확 와닿았다. 괜히 창피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바람에 그 애와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인사도 하지 못하고 후다닥 자리에 가 앉았다. 친해질 생각은 정말 하늘에 맹세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인사까지 안 할 생각은 없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오늘 인사를 씹었으니 이제 그 애는 내가 자기를 피한다고 느끼겠지? 딱히 바라지 않는 미래가 눈앞에 훤히 내다보였다.

 

금요일에 말했기에 이미 알겠으나, 그 애를 금요일에 처음 본 건 딱히 아니다. 첫째로 우리는 같은 반이고, 둘째로 그 애는 우리 반 반장이고, 셋째로 나는 반장 선거 때 그 애를 뽑았고, 마지막으로 그거 말고도 전에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민도 않고 바로 이름으로 불렀던 거고. 대화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름 정도는 기억할 사이였다.

 

사실 반장 선거에서 그 애를 투표할 때만 해도 그전에 본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뽑은 이유는 단순했다. 공약을 말하는 도중에 나랑 눈이 몇 번 마주쳤는데, 그 아이의 눈이 정말 밝았다. 너무 밝고, 밝고, 또 밝았다. 나는 그게 너무 보기 좋았고, 또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원래 없는 사람의 특징이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애 뽑았다. 그 아이의 밝은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워서.

 

그런데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주말 내내 그 애 생각에 젖어 있던 중 그 애를 작년에 본 게 기억났다. 해사한 미소가 왠지 눈에 익다 했더니, 고등학교 올라와서 이동 수업 때 우왕좌왕하다가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거니와 그쪽은 나를 보지 못해서 서로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때도 그 애가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노는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하지만 이건 내가 반장 선거에서 그 애를 뽑았을 때와는 다른 부러움이었다. 반장 선거 때 느낀 건 그냥 햇빛을 동경하는 해바라기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1학년 때 느낀 건, 마치 신데렐라의 자리를 뺏고 싶어 하는 못된 언니의 마음과 같았다.

 

원래도 가까워질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던 차였으나, 그런 과거까지 떠올리고 나니 한 적도 없는 기대가 싹 사라졌다. 그 애는 그렇게 밝은 세상에서 사는데, 한낱 나 따위와 섞일 일이 어디 있겠는가. 빛과 어둠은 중간이 없다. 그 애를 내가 집어삼키려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앞으로는 물과 기름처럼, 극성 물질과 무극성 물질처럼…….

 

“민석아, 안녕!”

 

내 다짐은 헛수고가 됐다. 나는 나름 굳건한 다짐을 한 번 더 마친 차였는데, 별거 아닌 잡생각을 마치고 나자 어느새 내 옆에 그 애가 앉아 있었다. 물과 기름에 함께 두면 안 된다는 취급 주의가 붙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싶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마따나 내 옆에 있으면 그 애가 물 들지도 모른다. 어쩌면 좀 오글거릴 수도 있지만, 정말 사람은 옆에 있으면 물 들게 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게 싫어서 일부러 피하려던 거였는데, 하늘은 장난이라도 치듯 이런 시련을 내게 내밀었다. 야, 이것도 넘어 봐, 뭐 그런 메시지일까. 어째 비웃는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 왔고, 또 그 동시에 정말 웃는 소리가 내 바로 옆에서 들려 왔다.

 

“우산 빌려줘서 진짜 고마워.”

“아, 아냐. 그게 뭐 별거라고. 근데 왜 여기 앉은 거야?”

“헉, 혹시 싫어서 그래……?”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진짜 왜…….”

“그런 거구나! 아니, 진수가 눈이 안 보인대서 내가 자리 바꿔 주기로 했거든. 근데 마침 진수 짝꿍이 너였구나! 너한테 감사할 것도 있었는데, 진짜 딱 좋다. 안 그래? 와, 우리 운명 아니야?”

 

아니, 뭐 운명이랄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하고 내뱉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내 입은 굳게 다물렸다. 아무리 내가 굳은 다짐을 마친 차였다고 해도, 솔직히 닫힌 문 사이에도 틈은 있기 마련이다. 지금 그 애는 마치 그 틈에 대고 안에 누구 있냐고 묻는 격과 같았다. 아주 방심한 차에,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한 20일쯤 잘만 지내다가 지금 와서 눈이 안 보인다고 한 내 짝꿍도, 너무 착해서 자리를 바꿔 준 그 애도 조금 미워졌다. 아냐, 내 짝꿍들의 탓이 뭐가 있겠는가. 이게 다 기고한 운명을 가진 내 탓이지.

 

내 짝꿍(현재 짝꿍, 즉 변백현 얘기다)도 내 기분이 저기압인 것을 깨달았는지, 운명이 아니냐는 말을 기점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변백현이 너무 좋아 탈인 거지 싫은 건 절대 아닌데, 뭔가 저 반응을 보니 오해가 생길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톱만 딱딱 물어뜯는데, 갑자기 변백현이 내 손을 붙잡았다.

 

“어…….”

“손톱 물어뜯으면 몸에 안 좋, 아, 음…… 그렇대…….”

“어?”

“손톱, 물어뜯지 말라구. 아니, 그, 너 손가락도 예쁜데, 물어뜯으면 아프고, 그렇잖아. 앞으로는 하지 마, 응?”

 

여태까지 손톱을 뜯지 말라는 충고는 꽤 많이 들어 봤지만, 저렇게 간절하다는 눈빛으로 말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손톱을 뜯지 말라고 그렇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딱히 없으니까. 그런데 내 짝꿍 씨는 정말 일생일대의 소원이라도 되는 듯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잡힌 손도, 뜯다 말아 달랑거리는 손톱도, 잡히지 않은 손도 어찌할 도리를 몰라 방황했다. 손을 잡혔다는 사실이 괜히 부끄러워서 귀까지 뜨거워졌다. 감기도 3일이면 낫는데 짝꿍병(이름은 방금 지었다)은 어째 3일 지나니 더 깊어진 것 같다. 자기가 장이야 뭐야, 진짜.

 

시선 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애꿎은 소매만 만지작거리다가, 열심히 고심한 후 입을 뗐는데,

 

“저기,”

“있잖아,”

 

장난처럼 발화가 겹쳤다.

 

“그, 너부터 말해.”

“아니, 음, 너부터 말해.”

“아…… 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 백,”

“응?”

“백, 그, 짝꿍아…….”

“금요일처럼 백현이라고 불러도 되는데……. 알겠어, 민석아. 아, 혹시 나도 짝꿍이라고 불러 줘야 하나?”

 

본래 붙임성이 없는지라 할 말이 없어 그저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변백현은 자기가 더 당황해서는 어버버 거리며 장난이라고 내뱉었다.

 

“네가 그렇게 반응하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 귀 빨게, 민석아. 내가 너무 놀렸나?”

“아니, 아냐. 그, 괜찮아.”

“그럼 계속 놀려도 된다는 거지?”

“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러나 변백현은 내 말을 듣고도 모르는 체하며 싱긋 웃었다.

 

“알겠어! 그럼, 앞으로도 쭉 놀리는 거로! 좋아, 좋아. 잘 부탁해, 민석아! 우리 같은 안경도 쓰고, 우산도 같이 쓴 사이잖아! 나름 운명인 사이인데, 잘 지내보자.”

 

어제의 당황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변백현은 능청스럽게 대답을 종용했다.

 

“알겠지, 민석아?”

“그래, 그, 짝꿍아.”

 

이유는 모르겠으나, 뭔가 이상한 대화를 마치고 나니 나는 어느새 ‘민석이’가 돼 있었고, 그 애는 ‘짝꿍이’가 돼 있었다. 아, 운동에서 페이스에 말려든다고 하는 건 바로 이런 거구나. 남과 겨루며 달려 본 적은커녕 주변에 심히 열정적인 사람을 둔 적도 없어서 와닿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냥 대충 아, 좀 말려드는 거구나, 했는데, 오늘에서야 그 표현의 의미가 재정립됐다. 정신 차려 보니까 엥, 내가 언제 당했지, 하는, 눈 떠도 코 베어 가는 거였구나.

 

어느새 놓인 손목과 왼쪽에 앉은 짝꿍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2주쯤 남은 3월이 매우 걱정되기 시작했다. 변백현 선수의 페이스에 말려서 자기 페이스를 되찾지 못한 채 이끌려 가는 김민석 선수를 동정할 여론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느님, 이렇게 된 거 딱 하나만 빌겠습니다. 제발 좋은 일은 바라지도 않으니, 나쁜 일만 없게 해 주세요. 독실한 크리스천 따위는 아니기에 하나님까지 바라지는 않으니, 애국가에도 등장하시는 하느님께 대신 빌었다. 하늘이시여 제발, 제가 평소에 비 좀 쏟아부으셨다고 원망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니 부디, 저랑 변백현에게 나쁜 일만 없게 해 주세요…….

 

 

 

 

 

 

 

 

 

 

그날―그러니까, 변백현과 내가 짝꿍이 된 날―만 해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가 싶었다. 아침에 대화한 이후로 변백현은 나에게 말을 딱히 걸지 않았고, 집에 갈 때 “내일 보자, 민석아!” 하는 것에 대고 “어, 어어.”라고 어물쩍하게 대답한 게 다였다. 이 정도면 서먹서먹한 짝꿍 사이로 끝날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살짝 아쉽기도 하지마는 이게 내가 바라는 바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합리화까지 마쳤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 중에는 자꾸 툭툭 건드리며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그 내용은 참 다채로웠다. 수학 시간에는 컴퍼스(왜 지수를 배우면서 컴퍼스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를 빌려 달라, 영어 시간에는 지문을 빠르게 해석하는 방법이 뭐냐, 문학 시간에는 과학을 몰라서 과학 지문을 못 풀겠다, 뭐 별별 말을 다 했다. 변백현의 끊임없는 부탁과 질문, 잡담에 다소 지친 나는 차마 무시로 일관하지도 못했다. 대신 컴퍼스는 없으며, 모의고사를 많이 풀었더니 이렇게 됐고, 과학을 몰라도 과학 지문은 풀 수 있다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나름 내치려는 표현이었으나 변백현은 되레 오오, 하는 소리를 내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수업은 당최 언제쯤 끝날는지 종소리만 기다리던 차에 드디어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었다. 종소리에 이어 흘러나온 방송은 2학년 1반부터 3반까지는 지금 내려오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2학년 1반인 우리는 급식을 일찍 먹는단 말에 아이들이 반을 우수수 빠져나갔다. 나는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수많은 학생이 모이는 급식실에 갈 기력이 차마 없었다. 주번에게 다가가 반에 있을 테니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전하고 책상에 엎드렸다. 누군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이제 잠들기만 하면 되겠구나, 싶던 찰나, 갑자기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아파?”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누가 봐도 변백현이었다. 나는 괜히 걱정시키기 싫은 마음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니, 안 아파. 그냥 졸려서…….”

“그래? 그럼 같이 밥 먹자! 오늘 급식 존, 아니, 엄청 맛있더라. 후식으로 딸기 요구르트도 나와!”

 

난 괜찮아, 하고 내뱉는 찰나 변백현이 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응?”

 

나도 안다. 수업 시간 중이라서 좀 그렇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말을 자꾸 걸어온 건 변백현 나름의 친해지고 싶다는 표시였을 거다. 그래, 나도 그걸 알기는 하는데…… 나는 오늘 하루, 내 인생 처음으로 쏟아진 그 수많은 관심이 이해가 안 됐다. 그게 단순히 우산을 빌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란 것 정도야 나도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음침하고, 조용하고, 별거 없는 나에게 관심을 두냔 말이다. 정말, 왜.

 

내가 고민에 빠져 우물쭈물하는 동안 변백현은 (강아지처럼 생긴 주제에)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을 보냈다. 나는 끝내 거절의 말을 내뱉을 수 없었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며 변백현의 손을 살짝 풀었다가 다시 잡으며 일어났다.

 

“……알겠어.”

“아싸! 빨리 가자, 빨리.”

 

좋다는 듯 눈이 접히도록 웃는 변백현을 보니 괜히 귓가가 달아올랐다.

 

“문 잠그지 말라고 해서, 내가 잠가야 해. 문만 잠그고 가자.”

 

강아지처럼 순종적으로 구는 모습을 보니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친구가 많은 건지, 변백현을 좋아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 건지, 새삼 알 것 같았다.

 

 

변백현이 하도 맛있다고 하길래 뭐 특별한 거라도 나왔나 했더니, 메뉴는 돈가스였다. 나는 돈가스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변백현은 진심으로 좋다는 듯이 한 입 먹을 때마다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과장하여 지은 미소는 덤이었다.

 

“돈가스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

 

입을 열려던 변백현은 자신이 돈가스를 씹고 있던 걸 깨닫고는 급하게 오물거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삼키곤 입을 다시 열었다.

 

“나도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닌데…….”

“너, 세상에서 돈가스 제일 좋아하는 사람 같아 보여.”

“넌 돈가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해?”

 

난 변백현의 근본 없는 질문에 글쎄, 라고 답하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도 글쎄?”

 

볼수록 참 웃기는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다 먹었으면 우리 매점 갈래? 안 먹겠다고 하는데 내가 데려온 거니까, 내가 쏠게! 콜?”

“그럼…… 그러든가.”

 

친해지지 않겠다면서 이러는 내가 좀 더 웃기는 것도 같고.